오늘은 기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요.
“우리는 수 없는 판단을 통한
선택을 하고 그를 통해 행동으로 옮기죠.”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마지노선을 정할 수도 있겠고
집단에서 이 행동이 올바른 행동인걸까,
학교에서는 어떤 교복을 입어야 할까
라고 판단하고 선택하게 되는
일종의 규칙을 지키는 것도 기준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는 우리는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서 학교의 인재가 되어야 해.
군대에서는 우리는 좋은 훈련을 받고 우리 국민을 지킬 국가의 인재가 되어야 해.
회사에서는 우리는 좋은 성과를 얻고 우리 나라를 높일 회사의 인재가 되어야 해.
다들 그런 생각 하지 않나요.
이게 학교, 군대, 회사가 만들어진
이유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그 집단의 목적이고,
자연스레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각 집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었어요.
학교에서는 “너네 고등학교 졸업하면, 애들 만날 것 같아? 응, 아니야. 공부나 해”
군대에서는 “다들 전국구에 있는데, 뭘 만나겠냐.” “야, 주 훈련병 훈련 똑바로 안 해?”
회사에서는 “회사가 연애하는 공간입니까, 헤어졌다고 집단퇴사한 것들 안 보여요? 일이나 합시다!”
근데, 어느 집단에서도 아이러니하게 커뮤니케이션은 필수라고 합니다.
서로에게 잘 보여야 하고,
아부를 해야 하고, 빈말을 해야 하고
스몰 토크를 잘 해야 한다며
스몰 토크라는 것에 대해
책까지 나오는 지경입니다.
그 집단의 기준과 목적이
커뮤니케이션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힘들어 할까요.
저 조차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결방안은 아직도 찾지 못 했습니다.
저의 살아온 환경이 이런 말을
들어온 환경이라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말을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보다 긍정적이고 조금은 아부를 떠는데 있어서
에너지를 많이 쓰질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저는 사실, 아부에 대한 기준에 있어
꼭 해도 되진 않는다는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뭐랄까, “아부가 밥 먹여주나요.”
라고 이야기했을 때 동의하진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생각이 든 건,
본인만의 기준이 생겨났을 때 거절할 권리도 생겨나고
그로서 본인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며
자존감 조차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부분이었습니다.
기준이 없을 때, 거절할 권리가 없을 때 보통
초점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상대더군요.
그 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진정 필수라고 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주체는 나이기에
나에게 기준을 두어 “내가 진정 이것을 원하는가?”를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봤음 좋겠단 말을 늘 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원하는가?”라는 말이, 물건일 수도 있겠고
단순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 행동 하나하나 사소한 것이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을 했을 때
불행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현상을 지켜보기만 한다 해도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그래서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건강한 행보는 “나의 기준을 잘 지킬 수 있는 환경에서 함께 하는가.”일 듯 해요.
나의 기준이 잘 지켜졌을 때, 자존감도 관리할 수 있고
그 환경 속에서 시너지를 발휘하여 기존에 없었던
또 하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의 기준과 타인의 기준이 무조건 같을 수만은 없는 것 같다고 체감합니다.
그 기준을 조율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개인차가 있겠지만은
제 개인의 삶에 대입 했을 때, 그 조율이 에너지가 가장 많이 쓰이더군요.
어쩌면 그 기준을 조율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융화가 되고
기준점이 일치가 되는 환경을 발견할테니까요.